그곳에 가고 싶다

성북동, 낭만에 대하여

푸르른가을 2011. 10. 17. 18:55

[동아일보]

“혜화동 고개에 올라서서 성(城) 돌에 앉아 우이동 연봉을 바라보는 맛과 삼선교에서 성북동 뒷산을 보며 황혼길을 걸어오는 맛은 동양화의 운치가 있다.”(시인 조지훈)

“석양이 내 정원에 비낄 때면 피로한 신경을 이끌고 발길이 문을 나선다…성북동의 산보로는 달밤이 더욱 좋다. 그러나 반드시 겨울달밤이어야 한다. 나는 가끔 찬 달밤 별들을 헤아리며 등불이 묵묵히 박힌 산 밑 길을 묵묵히 거닐기도 한다.”(미술사가 김용준)

조지훈과 김용준은 모두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살았다. 시인 김광섭은 1960년대 성북동 산기슭에 살면서 시 ‘성북동 비둘기’를 지었다.

한국 근현대기, 서울 성북동 일대는 예인들의 창작과 교유의 터전이었다. 이 지역에 연고를 두었던 문화예술인 16인의 흔적을 짚어보는 전시와 답사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서울 성북동 성북구립미술관이 개최하는 특별전 ‘그 시간을 걷다’(12월 4일까지)와 답사프로그램 ‘예술가의 길―흔적’(12월 3일까지).

16인은 문학 분야의 김광섭 박태원 이태준 전광용 조지훈 한용운, 미술 분야의 권진규 김기창 김용준 김환기 박래현 변종하 송영수, 문화재 분야의 전형필 최순우, 음악 분야의 윤이상. 이들의 초상사진 및 다양한 관련 사진, 이들의 창작품과 친필 자료, 주고받은 편지, 영상물 등을 선보인다. 성북동 예인 16인의 낭만과 열정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심우장을 짓고 조선총독부를 등진 채 민족과 예술의 지조를 지켜낸 만해 한용운, 온 재산을 바쳐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이를 간송미술관으로 발전시킨 간송 전형필에게선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배울 수 있다. 김광섭의 시에선 근대기 성북동의 변화에 대한 시인의 애틋함을, 수연산방을 짓고 소설 창작에 매진했던 상허 이태준이나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던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 부부에게선 예술혼의 싱그러움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교유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특히 흥미롭다. 1955년 미술사가 최순우의 부탁을 받고 전형필이 써 준 ‘亞樂書室(아락서실)’ 글씨, 조지훈이 1954년 ‘신천지’라는 잡지에 실은 한용운에 대한 글과 한용운 초상, 윤이상이 1949년 조지훈의 시 ‘고풍의상’에 곡을 붙인 가곡의 악보, 김환기가 1957년 프랑스 파리에서 최순우에게 보낸 엽서, 노시산방을 물려주고 물려받았던 김용준과 김환기의 인연 등. 1934년 박태원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문인들이 남긴 방명록도 재미있다. 이태준은 ‘1+1=1’이라는 글씨와 복숭아 그림으로 야릇한 의미를 담았다.

답사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29일까지 매주 수·금·토요일, 12월 3일까지 매주 수·토요일 오전 10시부터 3시간 동안 이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코스는 장승업 집터∼최순우 옛집∼윤이상 집터∼조지훈 집터∼김기창 박래현 옛 화실(운우미술관)∼성북구립미술관∼이태준 고택(수연산방)∼방인근 집터∼노시산방 터(김용준 김환기 집터)∼박태원 집터∼심우장∼서울성곽∼간송미술관. 가을에 잘 어울리는 코스다. 마침 성북미술관 옆 간송미술관에선 올해 가을 정기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02-6925-5011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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