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상자

[스크랩] 월드컵보다 뜨겁게, 당신의 꿈의 온도를 올려줄 책! <겁없이 꿈꾸고, 거침없이 도전하라>

푸르른가을 2010. 7. 4. 20:37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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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매주 5명 선정

 

 

 

월드컵보다 뜨겁게,

당신의 꿈의 온도를 올려줄 책!

 

 

 

체육선생님을 꿈꾸던 소녀가 국제축구심판이 되기까지.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 주심이 되고, 월드컵 무대를 꿈꾸기까지.

두려움 없이 꿈의 지평을 확장해나가며 어제의 꿈을 오늘의 현실로 바꾸어놓는

홍은아, 그녀의 위풍당당 도전기!


대한민국 최연소 국제축구심판, 세계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다!

2010년 잉글랜드 여자축구계엔 일대 파란이 일었다. 1972년 여자FA컵이 창설된 이래 최초로 아시아인이 결승전 주심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국인 홍은아. 2003년 대한민국 최연소로 국제축구연맹(FIFA) 심판이 된 이래 이룬 또 하나의 쾌거였다. 홍은아의 활약은 이것뿐이 아니다. 지난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여자축구 준결승전에서 주심을 맡기도 했으며, 2010년 한국인 최초로 유럽축구연맹(UEFA) 주심에 선정되는 등 그녀의 행보 앞엔 언제나 ‘최초’, ‘최연소’란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다.

축구심판으로서 이 같은 화려한 기록행진을 거듭하는 그녀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잉글랜드 남자 세미프로리그와 여자 프리미어리그에서 심판을 보고 있는 그녀는 앞으로 월드컵에서 심판 볼 날을 위해 지금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또한 국제스포츠기구에서 일하며 한국이 세계 축구를 리드하는 데 주역을 담당하는 것이 현재 그녀의 가장 큰 목표다.


‘우등생이 체대 가면 어때?’ 꿈을 이루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남이 뭐라든 내 꿈을 초지일관 사수하는 것!

부모님이 어렵게 얻은 무남독녀였지만 공주 같은 옷을 입고 인형놀이를 하는 것보다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체육시간이면 펄펄 날아다녔지만 남학생들은 축구, 여학생들은 피구를 시키는 데 ‘왜 꼭 그래야만 하지?’ 하는 조숙한 의문을 품던 아이였다. 중학교 때 장래희망은 체육선생님이었다. 그런데 1994년 미국월드컵을 계기로 꿈의 방향을 선회한다.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를 보는데 모두 선수들의 몸짓과 골에 열광했지만, 그녀 눈엔 유독 검은색 옷을 입은 심판만 들어왔다. 그때부터 축구심판이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 혼자 어학연수를 떠났다. 한국인도 별로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외딴 시골에서 홈스테이를 한 지 두 달 만에 영어가 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한국에 돌아온 순간부터 엄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상위권 학과에 갈 만한 성적이 아깝다는 말도 들었지만 체대 진학에 대한 뜻을 꺾지 않았다. 결국 결사반대하던 엄마도 그 꿈의 진정성 앞에 두 손 드시고 말았다.

이화여대 체육학과에 진학한 1999년, 축구심판이 되려면 어디서 누구에게 정보를 얻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생각 끝에 무작정 114에 전화를 걸어 “대한축구협회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꿈의 여정을 위해 첫 발을 뗀 순간이었다.


대한축구협회 심판에서 FIFA 심판으로, 경영학 석사에서 스포츠정책학 박사까지… 끊임없이 꿈의 지평을 확장해가다

만 20세에 대한축구협회 2급 심판 자격을 따고서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가서 1급 심판활동을 하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심판연락관 활동을 했다. 이어서 국내 1급 심판 자격을 땄지만 더 크고 넓은 무대에 대한 갈망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2003년 FIFA 심판 자격을 따냈다. 대학 4년간 심판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어느 쪽도 소홀히 하지 않은 덕에 대학원 경영학과에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동아리활동, 연애 같은 평범한 캠퍼스생활의 낭만은 별반 즐기지 못했지만, 꿈이 있는 자에겐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있는 법이란 걸 그녀는 안다.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생각했다. 스포츠에 관한 더 포괄적인 분야를 공부해 장차 국제스포츠기구에서 일하고 싶다고. 그래서 대학원 졸업 후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과 영국의 유수 대학들 중에서 고심하다 결국 스포츠정책에 관한 최고 명문인 축구종가 영국의 러프버러대학을 선택했다. 1년차에는 영국외무성 장학금을 받았고, 2~3년차에는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 해외학위과정 수혜자 1호가 되었다. 주중엔 학생으로, 주말엔 심판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엔 적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일정한 커리큘럼 없이 스스로 연구과정을 수행하는 영국의 독특한 박사과정은 엄격한 자기관리를 요구했다. 또한 한국과는 다른 잉글랜드의 축구문화에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더욱 강하고도 유연한 심판으로 다듬어졌다. 그 와중에 중앙일보 통신원으로 프리미어리그 현지 상황을 실시간 전달하는 역할도 도맡아 했다.

그녀에게 있어 꿈은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삶에서 이루고 싶은 모든 것들의 ‘집합체’인 동시에 한 발 가까이 다가설수록 한 뼘만큼 다시 커지는 무엇이다.


어린 나이, 여자, 비(非)선수 출신이라는 3가지 핸디캡을 이겨낸 건 1년간 매일 운동장 6천 미터를 달린 승부근성과 집념

대한축구협회 심판강습 체력테스트를 대비하던 당시 그녀는 매일 320m에 달하는 운동장을 스무 바퀴씩 돌며 모질게 훈련을 했다. 처음엔 다섯 바퀴를 돌기도 벅찼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면서부터는 서서히 몸이 마음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물리적 한계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마음에 장해물만 두지 않는다면 노력과 끈기로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10개월간의 혹독한 자가훈련 덕분에 체력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해 심판강습에 정식으로 참가하게 됐다. 하지만 다음 장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 여자, 비선수 출신이라는 세 가지 핸디캡. “선수로 뛰어본 적도 없는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심판을 하겠다고?” 사람들은 색안경을 끼고 봤다. 선수 출신이 경기 중 못 보고 지나치면 실수려니 하면서도 그녀가 못 보고 지나치면 ‘역시 비선수 출신이라 감각이 떨어지는군’이라고 했다. 그래도 기죽지 않았던 건 새로운 배움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축구팬으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던 경기규칙들을 배우는 데 푹 빠져 지냈다. 방학 때는 전지훈련에 참가하고, 학기 중에도 전국을 돌며 숱한 축구경기를 판정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을 기르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선수들보다 더 많이 달려야 하는 심판이지만, 그런 고된 일상조차 그녀에겐 그저 꿈의 실현이었다.


세상이 너의 홈그라운드다! 이제, 너만의 레전드(Legend)를 향해 질주하라!

2002년 9월 그녀는 영국 리버풀 호프대학에 교환학생으로 나갔다. 본고장 축구를 직접 맛보기 위해서였다. 영국 1급 심판 자격을 취득한 후 1년간 45경기를 뛰며 부지런히 실전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이 경험 덕분에 ‘최연소’로 국제심판이 될 수 있었다. 규정상 대한축구협회 1급 심판 자격을 얻은 후 2년간 경기를 뛰어야 국제심판 응시자격이 생기는데, 그녀는 영국에서의 1년을 인정받아 대한축구협회 1급 심판이 된 지 불과 1년 만에 국제심판이 되었다. 남들은 언어·문화 체험 정도로 생각하는 교환학생을 자신의 커리어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국제심판 자격을 얻는 데 영리한 전략만 활용했던 것은 아니다. 만 25세부터 주심 자격을 얻을 수 있는 FIFA 규정의 예외 선례를 찾기 위해, 200여 개 국가의 주심·부심 리스트를 찾아 한 명씩 생년월일을 확인하는 집요함도 있었다.

남보다 일찍 자신의 꿈을 정하고, 그 꿈을 위해 전력질주해온 대한민국의 글로벌인재 홍은아. 어린 나이에 성공했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의 꿈의 반밖에 이루지 못했다고 말한다. 앞으로 모든 심판들의 꿈의 무대인 월드컵과 프리미어리그에서 휘슬을 불고 싶고, 국제스포츠기구에서 조국을 위해 일하고도 싶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녀는 가슴 가득 큰 꿈을 품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는 자에겐 세계가 준비된 무대임을 웅변한다. 자신의 거침없는 도전에 자극받은 모든 이의 레전드 스토리를 기대하면서….

 

지은이 _ 홍은아

1980년 태어났다. 어렵게 얻은 무남독녀에게 예쁜 옷과 인형을 사주며 곱게 키우고 싶어 하셨던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공을 가지고 노는 걸 더 좋아했다. 운동이 너무 좋아 초등학교 시절엔 체육선생님이 꿈이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계기가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94년, 미국월드컵 <대한민국 : 스페인> 경기를 볼 때였다. 모두들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손에 땀을 쥐고 있는 동안 그녀 눈에는 심판만 보였고, 그때부터 심판의 매력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후 혈혈단신 뉴질랜드로 떠나 1년 동안 영어도 공부하고 축구도 했다. 1999년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했고 대한축구협회의 심판강습을 수료했다. 2000년 대한축구협회 2급 심판 자격 취득, 교환학생으로 잉글랜드 리버풀에 가서 1급 심판활동, 2002년 대한축구협회 1급 심판 자격 취득, 2003년에는 국내 심판으로는 최연소로 국제축구연맹(FIFA) 심판 자격을 획득했다. 이화여대 일반대학원 경영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축구대회에서 준결승전 주심을 맡았고, 2010년 한국인 최초 유럽축구연맹(UEFA) 주심, 2010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여자FA컵 주심을 맡았다. 2009년 말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시행하는 연례 시상식에서 올해의 여자심판상을 수상했다. 영국 러프버러대학교에서 스포츠정책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더럼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잉글랜드 남자 세미프로리그와 여자 프리미어리그에서 심판활동을 하고 있으며, 장차 월드컵 무대에서 심판을 보는 것과 국제스포츠기구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다.

출처 : 짠돌이
글쓴이 : 책神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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