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다

하늘처럼 바람처럼, 어느 팔방미인의 여행법

푸르른가을 2010. 6. 28. 13:57
하늘처럼 바람처럼, 어느 팔방미인의 여행법

최근 출간된 '그 여자의 여행가방'의 저자 이하람은 필명이다. 본명인 이현정을 두고 필명을 쓰게 된 계기는 몽골 배낭여행이다.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사람도 짐승도 착한 그곳에서 끝 간데없이 펼쳐진 초원의 바람을 맞으며 새 이름을 떠올렸다. '하늘과 바람'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필명이었다. 밤마다 무릎 위에 내려앉는 별들이 궁금해 떠났던 배낭여행은 그녀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었고 주목받는 여행작가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려놓았다.

  




◆여행증후군 극복하기
이하람은 대학 재학 시 학교 홍보도우미로 선발돼 활동했다. 명지대 교수이자 소설가인 박범신은 그녀를 '문예창작학과 톱(Top) 1'이라고 불렀다. 재주가 많은 탓인지 그동안 가진 직업도 여러 개다. KBS 라디오 구성작가를 시작으로 YTN 영화 프로그램 MC, 국민일보 인터넷뉴스팀 기자, KT 홍보실 및 지역 케이블방송 아나운서로 일했다.

   팔방미인이 펴낸 '그 여자의 여행가방'은 최근 2년간 일본, 프랑스, 영국, 독일, 벨기에, 몽골, 터키, 이집트를 주유하고 풀어낸 기록이다. 그녀는 두 달에 한 번꼴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대부분 혼자 떠난 여정으로 길면 한 달, 짧으면 보름이었다.

   "그동안 악착같이 모은 적금을 가장 빨리 써버린 시간이었어요. 다시 오지 못할 저의 이십대에게 주는 선물이자 축제이기도 했고요."
물론, 처음부터 2년이라는 긴 시간을 여행에 쏟아 부을 생각은 아니었다. 치유가 쉽지 않은 '여행증후군'에 걸릴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2007년 여름, 일본 규슈로 첫 배낭여행을 다녀온 직후부터 증상이 나타났다. '그곳에 두고 온 마음들을 밤마다 가져오느라' 몸살을 앓아야 했다. 증상은 여행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다양하게 나타났다. 현지 시차에 맞추었던 손목시계의 바늘을 귀국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돌려놓지 않았다. 또 현지 시각이 기록된 사진과 일기장을 뒤적거리며 한 달을 보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서랍 속 여권을 다시 꺼내들어야 증세가 가라앉았다.

   '여행증후군 극복 수기집' 출간 이후 많은 이들이 그녀의 실제 여행가방에 대해 물었다. 팔방미인의 캐리어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특별한 건 없다. 옷가지, 일기장, 스케치북, 디지털카메라, 선크림, 모자, 선글라스가 전부다. 가끔, 걷는 족족 밑창이 닳아버리는 3천 원짜리 슬리퍼와 땡처리 쇼핑 점퍼가 동행했다.

   "저에게 여행 짐을 싸는 건 집에서 혼자 점심을 챙겨 먹는 것과 비슷해요. 소담스런 그릇 대신 냄비 뚜껑에 밥 한 주걱, 명란젓 한 덩이면 충분하거든요. 털털하고 무뚝뚝하고, 어쩌면 여성성이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나 싶어요. 1학년 때 전공 교수님이 제 글을 보시고 하신 첫 말씀이 '너, 애교 없지!'였어요."



◆고등어 샌드위치의 추억
눈에 보이는 물품은 아니지만 이하람의 여행가방 안에는 특별한 게 들어 있다. '적당한 식욕'과 '그럴 만한 걱정'이다.

   '적당한 식욕'은 탐식과 구별된다. 일상을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적정 수준의 식욕을 말한다. 대부분 여행객들이 낯선 풍경과 문화를 접하면 폭식에 빠지곤 한다. '내가 언제 다시 여기에 오겠어?'라고 자문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게 다반사다. 여행지에선 1초도 아깝다는 듯 밤을 잊은 채 사진 찍고 쇼핑하며 마시고 먹는다.

   '적당한 식욕'의 그녀는 다르다. 볼거리, 놀거리가 아무리 많은 곳이라 해도 폭식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인지와 사고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 시속 100㎞로 달리는 자동차와 시속 10㎞로 굴러가는 자전거에서 보는 풍경은 다른 법이다. '여행은 다시는 못 와볼 곳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다음에 다시 한 번 꼭 오고 싶은 곳을 찾는 과정'이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천천히 꼭꼭 씹어 음미한 여행은 오히려 보존 기한이 길었다. 집에 돌아온 이후에도 여행지에서의 느낌과 기억은 새록새록 떠올랐다. 터키 이스탄불 갈라타 다리 옆에서 맛본 고등어 케밥도 그런 경우였다. 그녀의 모든 감각세포에 각인된 기억이 마트에서 고등어와 바게트를 집어들게 만들었다. '적당한 식욕'이 여행 이후의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은 셈이었다.

   "집에서 고등어를 구워 양파, 상추랑 같이 빵 사이에 넣어 먹었는데 그 맛이 그대로 재현되진 않았어요. 간고등어가 아닌 생물 고등어도 써보고 빵도 더 부드러운 것으로 바꿔보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죠. 그래도 먹을 때마다 이스탄불의 기억들이 다 되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그럴 만한 걱정'은 다른 여행객들의 안달복달 조바심이나 노파심과 비교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권 챙기랴 지갑 확인하랴,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혹시 사기꾼이나 납치범은 아닐까? 하면서 의심과 근심으로 하루를 수놓는 여행객들이 의외로 많다. 물론, 그녀도 원더우먼이 아닌 이상 만사태평은 아니다. 단, 걱정의 차원이 다르다. 그녀의 걱정은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만들어내는 산물이다.

   "이집트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에서 정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유물 보존 상태가 너무 허술해 안쓰러울 정도였어요. 낡은 미닫이문 진열장 안에 미라들을 아무렇게나 겹쳐 놓았는데 먼지가 뽀얗더라고요. 진열장 문을 열고 미라를 꾹 찔러보는 관광객도 있었어요."
귀국 후 카이로 고고학박물관이 새 건물로 이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이 졸업한 인천 만월초등학교가 더 좋은 곳으로 확장, 이전한다는 소식보다 더 기뻤다.

  



◆나와 우리를 찾아가는 지도
여행에 관한 가장 상투적인 수사로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을 꼽을 수 있다. 여행 후일담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표현이다. 물론, 실제는 다르다. 이메일과 휴대전화 로밍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여행을 통한 자아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여행은 어느새 일상의 연속이 됐다. 이하람은 여행 중에 휴대전화를 켜 놓지 않는다. 여행을 기회 삼아 주변의 모든 관계로부터 해방돼 최대한 자유로워진다. 여행지에서 그녀를 규정짓는 것은 국적, 성별, 나이가 전부다.

   "살면서 여행하는 시간이 길면 얼마나 길겠어요? 여행할 때만큼은 모든 관계를 벗어버리고 싶어요. 잠깐이지만 바람 같은 자유에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관계의 해방은 역설적으로 그 관계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첫 배낭여행지였던 일본에서 '나가사키 짬뽕'을 먹으며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을 굳힌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구속이나 권태를 느낄 만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를 좋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에 온 며칠 동안 여행의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전혀 생각나지 않은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여행에 가까워지고 일상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저 자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어요. 평소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 '나'의 모습이었어요."
그녀의 다음 여행지는 히말라야다. 올 연말이나 내년 상반기에 엄홍길휴먼재단이 주관하는 '히말라야 오지 초등학교 세우기' 프로젝트에 작가로 참가할 예정이다. 지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재외동포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에 스태프로 참여했다. 나를 넘어서 우리를 찾아가는 지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의 기억들이 그녀의 여행가방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사진/김주형 기자(kjhpress@yna.co.kr)ㆍ글/장성배 기자(up@yna.co.kr)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르페르, Yonhap Rep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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