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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Why] "편지·메모·습작 드로잉… 70 평생에 한장도 안 버렸제"

푸르른가을 2011. 10. 9. 12:15
[Why] "편지·메모·습작 드로잉… 70 평생에 한장도 안 버렸제"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111009090304470

출처 :  [미디어다음] 문화생활 
글쓴이 : 조선일보 원글보기
메모 : 무등산 자락 증심사(證心寺) 근처인 광주광역시 운림동 주택가에 '우제길미술관'이 서 있다. 현대적인 2층 건물에 너른 잔디밭, 설치미술 작품들은 작은 조각 공원처럼 보였다. 전라남·북도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이 갤러리 겸 작업실 주인 우제길(69)은 최근 마당 한쪽에 작은 야외 공연장을 만들었다. "서울에서는 구경하러 오는데 정작 동네 사람들은 '저것이 감자 창고냐 소금 창고냐' 하면서 잘 오지 않아서" 미술관을 공원처럼 만들었다.

↑ [조선일보]우제길이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초등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 그는 살면서 주고받은 모든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

↑ [조선일보]중학생 시절 우제길의 생물 노트. 꼼꼼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 [조선일보]56년간 그려온 그림을 비롯해 각종 문서와 자료를 모두 보관해온 우제길은 자신의 자료들로 대형 전시를 열고 싶어했다. 그 는“이 자료가 우제길의 역사이면서 광주 미술의 역사이고, 우리 현대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미술관 뜰에 설치한 조각 작품‘입석대(立石帶)’앞에서 우제길이 환하게 웃었다. / 광주광역시=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미술관은 곧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이미 건축가 승효상 이 디자인을 마친 상태다. 미술관 뜰에는 2층짜리 건물을 새로 지어 커피집과 아트숍을 낼 계획이다. 그의 아내 김차순(57)은 "이 근처 땅이 안 팔리다가 공연장과 공원을 만든다니까 싹 다 팔렸다"며 "파주 헤이리처럼 꾸미고 싶은 꿈이 이뤄질 모양"이라며 웃었다.

우제길은 '남도(南道)의 빛'을 표현하는 작가로 이름났다. 추상(抽象) 작업을 주로 하는 그는 2009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선정한 '한국현대미술가 100명'에 든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우제길을 만나러 간 것은 그의 미술관 지하에 소장된 그의 '사적(私的) 기록물'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뭐든 버리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공책도 모아두고 편지도 버리지 않고… 물론 그림도 한 장 버린 게 없제." 지상층보다 훨씬 넓은 그의 미술관 지하는 천장 높이가 6m에 이르는 대형 작업실이다. 그는 주로 몇백 호(號)짜리 큰 그림을 그린다. 지금 작업실에 걸린 그림도 가로 430㎝짜리다.

그런 작업실 한쪽에 그의 '보물창고'가 있다. 이곳에 그는 중학교 1학년이던 1955년부터 그린 모든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 게다가 편지와 엽서, 명함, 카탈로그, 일기, 메모장, 방명록, 신문 스크랩, 생활기록부와 성적표까지 '문서'라고 부를 만한 자신의 모든 기록물을 간직하고 있다.

편지는 1966년 그가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받은 위문편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누렇게 변색된 한 편지에는 '어서 전쟁이 끝나서 길(우제길)이 조국에 돌아오면… 順(순)은 멀리서나마 흐뭇할 텐데…' 하는 '순'이란 여고생의 편지도 있었다. 편지 말미엔 '1966. 2. 26 밤. 순 올림'이란 글씨가 또렷했다.

우제길은 심지어 자신이 보낸 편지도 모두 복사해 갖고 있었다. "보내기 전에 복사를 한 부 해요. 아직도 컴퓨터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를 전부 손으로 씁니다." 그는 신권 화폐에 그림을 그린 이종상 서울대 교수에게도 '그림이 참 좋다. 존경한다'는 편지를 써 보냈었다. "그랬더니 이 교수님이 전화를 걸어와 '고맙다'고 했제. 편지를 보내줬으면 참말로 좋았을 것인디."

그의 수집·보관방식은 완벽에 가까웠다. 원화(原畵) 한 장을 보관할 때 그는 원화를 찍은 필름과 사진, 밀착인화(필름 크기로 인화한 사진), 디지털 파일 형식으로 각각 보관한다. "딱 한 번 편지를 찢어버린 적이 있어요. 1979년 전남일보에 한승원 작가가 '물개'란 소설을 연재할 때 제가 삽화를 그렸는데, 신문사 사장이 세 번이나 경고할 만큼 그림이 야했제. 여수에서 한 독자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너무 자극적이다. 독자를 우롱하는 거냐'는 내용입디다. 화가 나서 확 찢어버렸지요.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인디, 내 부덕의 소치여."

인터뷰에 앞서 그는 기록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골라 보여줬다. 고 3이던 1960년 한 해 동안 그린 드로잉만 1300장이 넘었다. 시간순으로 정리된 그의 그림들은 작가의 성장사이자 현대 한국 사회상이 고스란히 응축된 사회적 창작물이었다. 회화·판화·콜라주·설치미술·패션디자인·영상예술까지 거의 모든 미술 분야를 섭렵해온 그는 "내 그림뿐 아니라 나의 일기와 편지, 메모, 방명록까지 모두 합쳐진 것이 오늘날 우제길의 미술"이라고 말했다.

1966년 '우제길 비에트남 종군작품전'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그의 개인전은 총 74회에 이른다. 연평균 1.6회가 넘는다. 통상 작가들이 개인전을 2~3년 주기로 여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횟수다. "작가는 끊임없이 작업을 해야 하고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작업도 많이 하고 전시도 많이 하는 것이죠."

광주서중을 졸업한 뒤 광주사범학교와 광주제일고 진학을 놓고 고민했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 광주사범을 택했다. 그곳에서 앵포르멜(Informel·2차대전 후 등장한 추상예술 사조)의 영향을 받은 미술교사를 만나 추상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대화 도중 "내가 서울대 나 홍대 를 나왔더라면" 하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진학을 포기했던 광주일고 모집 요강도 고이 접어 보관하고 있다. "서울대나 홍대 미대를 나왔으면 지금보다 더 유명한 작가가 됐을 수도 있제. 그러나 인생을 어찌 알겠는가. 내가 광주사범을 가는 바람에 뛰어난 미술선생님을 만났고, 오늘날의 우제길이 된 것이니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