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상자

[스크랩] [사람속으로] “중앙亞 한국학 전파에 인생 걸었죠”-김필영 교수님 -

푸르른가을 2011. 10. 18. 14:59
[사람속으로] “중앙亞 한국학 전파에 인생 걸었죠”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050130080039611

출처 :  [미디어다음] 사회 
글쓴이 : 경향신문 원글보기
메모 :

그 사람, 한국학자 김필영씨(52)를 빼고선 중앙아시아의 한국학을 논할 수 없다.

지난 15년 동안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한국학을 전파한 선구자.

이 땅에선 그저 한 사람의 한국학자로 알려졌을 뿐이다.

지난해 9월 한국에서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강남대 출판부)를 내기 전에는 그랬다.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녔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새 봄에 그는 한국에 온다. 오는 3월부터 강남대에 대우교수로 부임해 중앙아시아 고려인문학을 강의한다.

내년 3월에는 강남대에 신설되는 카자흐스탄학과 주임교수를 맡을 예정이다. “

‘한국학’이란 단어는 한국인이 만든 게 아니고 1956년 파리대학에 한국학이 개설되면서 생겼습니다.

한국학은 의학・공학・자연과학을 제외한, 한국과 한국인과 관련된 모든 학문을 의미하죠.

한국학을 하려면 외국어도 잘 해야 돼요. 세계문화와 우리 문화를 비교하려면 적어도 6개국어는 해야잖아요?”

그는 9개국어에 능통하다.

#파리의 포도농군 한국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해 준비중인 그를 만났다.

파리 최고번화가인 오페라가에 위치한 그랑호텔 카페 드 라 패에서 만난 김교수는 처음 보는 기자에게도 격의가 없었다.

“패(Paix)가 ‘평화’를 뜻하잖아요. 그래서 한국 교포들은 프랑스식당인 이곳을 ‘평화다방’이라고 부릅니다.

지난해 12월 노무현 대통령도 이 호텔을 방문했죠.”

전채요리로 주문한 생굴이 나오자 굴껍데기에 담긴 물이 몸에 좋으니 남김없이 마시라고 권했다. 편했다.

포도주를 주문할 차례. 그의 눈이 빛났다. 와인리스트의 포도주 빈티지를 척척 맞힌다.

“10년 전부터 파리 서남방 300㎞ 부근인 소뮈르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어요.

10ha 규모의 농원이 있고 양조장도 있죠.

적포도주, 샴페인성 포도주, 단맛이 강한 후식용 포도주 등 세 종류를 생산합니다.

제법 잘 팔려요.” 디종에서 포도주 양조학 학사까지 땄다고 덧붙였다.

학자가 무슨 포도주 사업을 하느냐고 물으니 파리 15구에 중형 호텔을 지어 경영도 했다고 한다.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느냐고 했더니 “한국학을 보급하고 한국학자를 육성하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을 아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한국의 힘은 커집니다.

그동안 한국학에 2백만달러(약 20억원)를 투자했어요. 한국학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계속 하겠습니다.” 카자흐스탄에 1,600가구 규모의 아파트타운을 건설하고 북한에 화장품회사를 세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독야청청한 학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자유롭고 거침없다.

그의 박사논문을 지도한 스승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의 말대로라면 그에게는 역마살이 단단히 끼었다.

성인이 된 후 30여년 동안 이곳저곳 누비며 바삐 살았다.

#프랑스 최초 한국학 박사 경북 예천에서 동학혁명군의 손자로 태어난 그는 고교 재학시 책가방에 영문판 ‘자본론’과 사회주의 서적 ‘맑시즘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를 넣고 다니며 읽었다.

장발 단속에 걸렸을 때 머리는 문제도 아니었다.

가방속 불온서적이 튀어나와 구류를 살았다.

군사정권하의 청춘은 너무 깨어 있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진학하지 않았다. 이 땅이 싫었다. “그렇다고 반체제인사는 아닙니다. 진보주의 신봉자일 뿐이죠.

10대 후반, 20대 초반엔 지구상에 정말 멋진 세계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크고보니 세계는 하나였어요.”

78년 미국에 머물다 프랑스로 간 그는 파리 7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다 한국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파리대 이옥 교수(1928~2001)의 충고로 한국학에 눈떴고, 80년대 중반 파리 동방어문대학에서 논문 ‘정지용의 시적 미학’으로 프랑스 최초의 한국학 박사가 됐다.

56년 파리대학에 한국학과 개설후 1호 박사의 쾌거를 이루었다.

저서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37년부터 91년까지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어로 발표된 고려인들의 문학작품을 시기・장르별로 정리하고 평가한 역작이다.

분량이 무려 1,060쪽에 달한다. 자료 수집에만 12년이 걸렸다. “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문학은 한민족 문학사의 중요 부분입니다.

문학적 가치를 따지기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민족의 말과 문화를 지키려 한 고려인들의 노력을 평가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카자흐스탄에는 한국어 신문인 고려일보도 발행되고 70년 전통의 고려극장도 있습니다.”

#강남대 카자흐학과 교수로 왜 평생 한국학인가. 결정적인 이유는 중앙아시아에서 한인들을 연구하던 고려인 연구분야의 선구자 고송무(1947~1993)때문이다.

80년대 말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고씨와 김씨는 92년 파리에서 국제비교한국학회를 창설하는 등 의기투합한 사이. 영원히 같은 길을 가자고 맹세했다.

그러나 고씨는 교통사고로 객사했고 김교수는 유지를 이어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언어와 문화 재생에 관한 연구를 한국학으로 발전시켰다.

93년 우즈베키스탄 국립 타슈켄트 동방학대학교에 한국학대학,

94년에는 국립 카자흐스탄 대학에 한국학과를 신설했다.

2000년에는 카자흐스탄 최초 수도인 크즐오르다에서 중앙아시아한국학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94년 카자흐스탄대에 한국학과 학과장 겸 한국어문학 교수로 임명된 후 첫 졸업생이 배출된 99년 6월까지 재직했다.

후에는 파리로 돌아와 동방어문대학 한국학과 교수로 활동하다 지난해 12월 퇴직했다. 한국 강단에 서고 고려인문학 논문도 준비하기 위해서다. “알마티에서 1,200㎞ 떨어진 크즐오르다에 가려면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오지여서 선교사나 가지 학생들이 입학을 원치 않았죠. 94년 학과 개설 후 학과가 폐지될 위기여서 2000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살며 한국학과를 사수했죠.” 한국학 전파를 위한 준비기간까지 합하면 카자흐스탄에서 15년을 보낸 셈이다.

남편의 역마살을 좋아하는 아내가 있을까.

프랑스 여성 조 엘(53)과 결혼해 두 아들(대학생)을 낳았는데, 결혼 후 카자흐스탄을 떠날 수 없어 두 부부는 6년 동안 떨어져 살았다. “

고박사가 중앙아시아를 지키기로 했는데,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어떡합니까.

아내에게 1년 뒤 파리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6년이나 머물고 말았죠. 가족에게 못할 일을 한 셈이죠.”

올해도 살뜰히 가족을 챙길 수 없다.

한・불수교 120주년이고 멕시코 이주 100주년이다.

프랑스, 멕시코, 한국, 중앙아시아, 북한을 누비며 한국학 업무를 본다.

5월엔 멕시코에서, 9월엔 키르기스스탄에선 중앙아시아 한국학회를 개최한다.

포도주 양조학 서적도 출간한다. 시도 써야 한다.

2003년 시 ‘지고개 전설’로 재외동포문학상을 탔다. 행동하는 한국학자의 항로는 고단하고도 화려하다. 〈유인화 매거진X부장 ・ 파리| rhew@kyunghyang.com〉

 

#. 원글이 너무 이어져 있어서 읽기 불편하실까봐 제가 마침표 있는 부분을 제 임의대로 띄어쓰기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