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고마워요 내사랑

푸르른가을 2010. 8. 6. 16:33

온 세상이 새로운 시작으로 설레던 2007년 봄, 세 아이의 엄마였던 안은숙씨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폐암 말기, 남은 시간은 1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대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이혼의 아픔을 감내해가며 만난 남편 김경충씨(43)와 첫 결혼 때 얻은 딸,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두 아들을 위해 살고 싶었다. 그녀는 고3인 하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섯 살인 단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다섯 살 준이가 쑥쑥 자라는 것을 꼭 보겠다고 그렇게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안은숙씨(48)의 약속 중 한 가지는 지켜졌다. 흉수가 차서 호흡이 가빠진 상태에서도 은숙씨는 딸 하나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남편 김경충씨(43)에게 업히다시피 도착한 졸업식장에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꽃을 한아름 안고 화사하게 웃는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악착같이 보낸 몇 주일. 한 남자와 세 아이를 절절하게 사랑했던 여자, 은숙씨는 바람에 연한 꽃 냄새가 실려 오던 3월 12일 끝내 생을 놓았다.

온몸으로 전이된 암 덩어리들과 싸우면서도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은숙씨의 이야기는 MBC-TV '휴먼다큐 사랑'의 '고마워요 내 사랑' 편을 통해 방영돼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그리고 늘 글을 쓰고 싶어 하고, 글쓰는 사람이 되어 살고 싶었다는 아내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 남편 경충씨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며 남긴 소소한 기록들을 들고 출판사를 찾았다. 한 남자와 여자가 키워온 지난한 사랑이 담긴 수십 권의 노트는 「고마워요 내 사랑」이란 이름의 책으로 엮였다.

그리고 여기, 방송으로 전해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한다. 자신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남자에게 보내는 은숙씨의 이 편지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숨겨진 소중한 사랑을 다시 한번 꺼내보길' 바라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고백이다(기사는 안은숙씨가 남긴 글을 토대로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 편집자 주

#첫 번째 편지





당신을 처음 만난 건 1995년, 초봄이었죠. 봄이지만 아직은 겨울이 한참이나 묻어 있던 쌀쌀한 날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겨우 스물여덟의 명문대 출신 엘리트 청년이 우리 학원 수학선생님으로 새로 오게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바로 당신이었어요. "김경충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며 환하게 웃는 당신을 마주하며 '참 시원한 사람이다' 생각했죠.

말수가 적은 편이라 늘 사람들과 말보다는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던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쪽은 언제나 나였어요. 워낙 사교적인 성격이기도 했고, 더구나 당신은 저보다 다섯 살이나 아래라 한참이나 어린 친근한 후배같이 느껴졌거든요. 동료로 함께 일하면서 당신과 '가까우면서도 어려운' 사이로 지냈지만, 정말 이상한 일은 당신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던, 한 가닥 인연도 꿰맞출 수 없던 남남인 당신과 나였는데 왜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걸까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혹시 예전에 이 사람과 내가 가족이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닮은 구석이 많이 보였고 생각이 일치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죠. 내가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그 사람만이 나를 찾아내듯 초점이 맞춰지는 느낌, 마치 자석 같은 그 느낌이 나를 당신에게 이끌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때의 나는 자꾸만 말이 닿으니 마음도 가까워지는 것만 같아 당신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때론 불편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가 누군가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게 느껴지던지요. 한 번의 결혼 생활 이후, 말을 잃은 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당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 세월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두근거렸어요.

참 좋은 사람, 당신을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봅니다. 학원에서도 당신은 '인기 강사'였죠. 당신은 성적만, 공부만 강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 입시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도 중요하지만 너희들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선생님이었으니까요. 누구든 불편하지 않게, 다른 사람이 귀찮지 않게, 뭐든 먼저 나서서 학원 일을 챙기는 자상한 당신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했었죠. 그런 사람이 그 누구보다 내게 친절하게 굴 때면 '쿵쿵' 울려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는 않을까 눈치를 살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당신이 내게 해주는 사소한 말들이 꽃씨처럼 차곡차곡 마음에 심어 자라기 시작하더라고요. 아마 몰랐겠지만, 당신이 처음으로 내게 밥은 먹었는지를 물었을 때, 정말로 눈물이 나려 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그때까지 누구도 내게 밥은 먹었는지, 굶고 있지는 않은지, 지쳐 있는 건 아닌지 따위를 걱정해주지 않았거든요. 가족들은 내게 언제나 밥을 달라고 했고, 피곤하다고 했고, 우산을 가져다달라고 했으니까요. 눈에 들어올 만큼 예쁜 구석도 없고, 젊음은 이미 한참이나 지났고, 아이까지 있었던 나에게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던 걸까요.

그때 내 나이 서른셋, 삶은 언제나 폭풍 같았어요. "엄마, 안녕! 돈 많이 벌어와." 아침이면 어린 딸은 출근하는 내게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었죠. 딸 하나의 말대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시작되는 아침, 얼른 부자 엄마가 되어 매일 아침 하나를 떼어놓지 않고도 얼마든지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는 삶을 이루고 싶을 뿐이었어요. 어느 순간, 이제는 그 누구도 나를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이후로는 나는 여자이기를 이미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거울 보는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고 예뻐 보이기 위해 치장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죠. 저는 그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생활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살림을 해야 하는 '전사'였어요.





지난 2월, 은숙씨가 꼭 직접 참석해 축하해주고 싶었던 하나의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귀한 사진을 남겼다(사진 위). 은숙씨가 하늘로 떠나고, 하나가 어학연수로 먼 곳에 있어 지금은 이렇게 셋이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거울 앞에 앉게 했어요. 내가 거울 앞에 앉아 내 얼굴을 보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만든 거예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다시 돌이켜보게 하고, 내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진짜'를 향해 아기처럼 걸음마를 하게 만들었어요. 내 이름이 '안은숙'이라는 것, 나는 여자라는 것, 그리고 아직은 젊다는 것, 그것들을 다시 꺼내보게 해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당신이 있어 '사는 것'이 좋았어요. 대단한 것을 바란 적은 없어요. 그저 매일 당신을 볼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거든요. 매일 당신을 만나 차 한잔을 함께 마실 수 있어서 사는 게 아무리 고단해도 힘들지 않더라고요. 밤이면 내일 또 당신을 볼 생각으로 잠을 청했고, 아침이 되면 이제 곧 당신을 볼 거란 생각에 설례요.

#두 번째 편지


하지만 그 설렘이 마냥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었죠. 실은 무서웠어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를 질책하기도 여러 번. 나는 나이도 많았고, 아이도 있었고, 가진 것도 없었고, 사랑에도 자신이 없었어요. 마음을 다독이고 가라앉히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데도, 이성이 마비된 듯 감정의 소용돌이를 감당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무엇보다 진짜 겁이 나는 건 점점 더 깊이 당신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내 마음이었어요. 기쁠 때, 우울할 때, 지칠 때, 배가 고플 때, 다리가 아프거나 조금 쉬고 싶은 순간에도 당신이 생각난다는 게 두려웠어요.

나만큼이나 그때의 당신도 혼란스럽고 힘들었겠죠. 지금 돌이켜봐도 참 힘들고 쓰라린 시간들이었어요. 하루 종일 가만가만 눈으로 나눴던 대화, 나란히 버스를 기다리며 서성대던 겨울밤 거리, 서로의 가방에 몰래 넣어두던 편지, 상처보다 쓰라리고 아팠던 첫 입맞춤, 헤어짐을 얘기했던 카페, 서로를 잊고자 몰두했던 눈물의 기도들…. 누군가에게 사랑은 축복일 테지만, 우리에겐 지옥이었는지도 몰라요. 사랑 때문에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그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함께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몇 번의 이별과 재회, 체념과 용기, 떠남과 돌아옴, 비움과 기다림을 반복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생각은 '당신과 나는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어요. 마치 누군가 우리 두 사람을 놓고 장난하는 것처럼 한 걸음 다가서면 깊은 강이 막고, 다시 멀어지면 강 위에 다리가 놓이는 일이 반복됐죠. 그리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던 건 당신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인 것 같아요. 한밤중 일어난 대형 사고. 지방으로 떠난다는 건조한 말 한마디 남기고 떠나버렸던 당신이 끝내 참지 못하고 내 얼굴을 보러 왔던 그날, "얼굴 봤으니 이제 됐다"고 이를 악물고 돌아서던 그 길에 무면허 운전자의 차에 치여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잖아요. 의식이 가물가물했던 당신이 간호사에게 겨우 말한 전화번호가 내 것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당신이 움직이지 못한 채 입원해 있는 동안 당신이 누워 있으니 나를 떠날 수 없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떠먹여주는 밥을 받아먹고, 나와 종일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던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르죠?

당신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상,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 깨지고 넘어지더라도 부딪혀야겠더라고요. 우리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부모님들의 반대, 생활의 어려움, 끝없는 걱정과 죄책감…. 숨고 싶을 만큼 복잡하고 힘든 일들이었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삶이라 생각했어요. 너무나 막막했지만 이제는 제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당신을 잃지 않고 싶었어요.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어요. 당신 곁에서 그냥 사랑하며 살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딸 하나에게는 많이, 정말 많이 미안해요. 자신의 곁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또 새로운 환경과 맞닥뜨리고, 자주 혼자였던 하나는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요. 그리고 나 때문에 마음고생 하셨을 부모님. '너만 행복하면 엄마는 괜찮다'고 말하며 눈물 흘리시던 내 어머니와 처음에는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던 당신의 부모님. 당신이 나의 임신 소식을 전하러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끝끝내 우리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부모님께 "자식 하나 없는 셈 치시라"는 말을 내뱉고 왔다고 했을 때 나는 굳게 다짐했어요. 평생 당신한테 잘할 거라고, 끝까지 이 남자의 편이 되어줄 거라고. 그러면 그분들께도 조금이나마 사죄받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세 번째 편지


그리고 시작된 '우리'의 시간들. 나는 정말이지 당신과 함께 맞는 매일 아침이 미치게 좋아서 꿈만 같았어요. 곤히 잠든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얼굴을 만지고, 얼굴 가까이에 코를 대고 당신의 냄새를 맡을 때면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귓불까지 붉어지는 듯했죠. 수도 없이 하던 밥 짓는 일이 어쩌면 그렇게 설렐 수 있었을까요. 밥이 익어가는 냄새가 그렇게 구수하다는 걸 그제야 비로소 알았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통을 열어 내 남자가 먹을 밥을 공기에 담는 일이 달디달게만 느껴졌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내가 애교를 부릴 줄 안다는 것도 당신과 살면서 알게 됐어요. 별것 아닌 말에도 당신이 자꾸만 큰 소리로 웃어주니까 계속 종알거리게 되더라고요. 출근하는 당신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도 너무 오랫동안 꿈꿔왔기 때문인지 소중하고 또 귀중했어요.

내 꿈은 그때부터 끝까지 쭉 하나였어요. 평생 당신 옆에서 함께 늙어가면서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고 또 그 아이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 시골에 작은 집 하나 짓고 강아지도 키우면서 당신 닮은 아이를 둘 낳아 우리 하나까지 다섯이 오붓하게 도란도란 사는 것. 그리고 이 다음에 우리 아이들 다 시집, 장가보내고 나면 당신이랑 나랑 서로 등 긁어주고 다리 주물러주면서 늙는 것. 내가 이 꿈을 얘기했을 때, 당신이 그랬죠? 당신의 바람은 나랑 한날한시에 같이 죽는 거라고. 그때는 우리의 꿈들이 어쩐지 꼭 이루어질 것만 같았는데…. 그날 밤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우리가 나란히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꿈도 꿨다니까요.

생각해보면 사는 일이 만만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참 행복했지만, 여기저기 벌여놓은 사업으로 인한 적자와 빚 때문에 매일이 고단함의 연속이었으니까요.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빚에 굳게 믿었던 사람의 배신까지 겹치자 당신이 회사 공금에 손을 대 구속되었을 때, 그 기간 동안 세 아이를 돌보고 빚을 갚고 사업을 관리하기가 솔직히 지독하게 고단하더군요. 당신이 1년 4개월의 형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도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변해버린 주변 환경 때문에 차가워진 당신을 보면서 마음이 쓰렸어요. 일터를 등지고, 사람들을 외면하는 당신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을지 몰랐던 건 아니었지만 전부를 감싸 안기엔 나 역시도 많이 지쳐 있었나 봐요. 만약 그때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내려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계속 한동안 서로 어긋나 있었을지도 몰라요.





김경충씨가 1년여 동안 떨어 져있던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

2007년 6월, 정말 '말도 안 되는' 폐암 말기 진단과 함께 앞으로 1년밖에 못 살 거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더군요. "당신 죽는다네? 그런데 웃기지 말라고 그래. 사람 목숨 그렇게 쉬운 거 아니야. 나, 당신 그렇게 안 보내." 당신은 그렇게 내게 말했죠. 그리고 나는 몇 번이고 되물었던 것 같아요. "나, 낫게 해줄 거지? 당신 믿어도 되는 거지?"

그때부터 이어진 시간들은 오직 '살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어요. 열두 달이 지나면 죽을 거라던 그 시간을 훌쩍 넘겨 2년 3개월, 그 예쁜 시간들은 TV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기도 했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 점점 마비되는 다리,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이어지는 구토…. 견디기 힘든 날들 속에서 나를 붙잡아준 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 하나, 준이, 단이 그리고 당신이었어요. 아이들이 '2021년 3월, 고등학교 입학식에 엄마 아빠가 건강한 모습으로 축하해주러 오셨어요. 2028년 2월, 서울대학교 졸업식에 엄마 아빠가 건강한 모습으로 축하해주러 오셨어요'라는 미래 일기를 읽어줄 때면 자꾸만 '좀 더 살고 싶다'는 욕심이 났지만, 그래서 이를 악물고 노력해보기도 했지만. 여보, 나는 이제 잠시만 눈을 붙이려고 해요.

당신은 언제나 내게 큰 산이었어요. 언제나 꽃이 피고, 바람이 한들거리고, 시린 등을 덥혀주는 볕이 따스한 산이요. 그래서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었나 봐요.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알죠? 너무 많이 울지 말아요. 너무 금세 웃지도, 너무 아무렇지 않은 척도 하지 말아요. 나, 살면서 두고두고 기억해줘요. 그렇다고 너무 오래 혼자 있지도 말고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 엄마 없어도 늘 당당하고 외롭지 않게 해줘요. 내 심장 같은 딸 하나를, 보물 같은 아들 단이와 준이를 나한테 했던 것처럼 사랑해줘야 해요.

내일은 3월 12일, 우리가 결혼식을 하기로 했던 날이네요. 얼마 전 웨딩드레스를 맞추러 갔을 때,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던 당신 얼굴이 생각나요. 오래 살다 보니 나한테도 이런 순간이 오는구나 싶어서 가슴이 마냥 떨렸지 뭐예요? 아쉽지만 그 결혼식은 결국 못하게 되려나 봐요. 졸음이 몰려오네요. 조금씩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기분이에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내 사랑.

<■글 / 이연우 기자 ■사진 제공 / 출판사 포북 ■참고 서적 / 「고마워요 내 사랑」 (안은숙 저, 포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