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소년이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창문을 열고
몇 안되는 별들에 가슴 설레이는 그런 소년
새벽 틈 사이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어리광 부릴 줄 아는
내 사랑하는 아내, 모두가 시입니다.
우린 가끔씩 마셔야 합니다.
고뇌도 바램도 기쁨마저도 마셔야 합니다.
물론 안주는 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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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에 나에게 보냈던 엽서 글이다.
그 친구는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시라고 여길만큼
행복하던 시절에 그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미 십 몇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에겐 가장 슬픈 일이며
지칠줄 모르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곳은 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처음 일자리를 구했던 면목동의 어느 회사에서 였다.
아마 우리는 서로를 금새 알아 보았던 듯 싶다.
몇 마디 대화중에 그가 먼저 소주 한 잔 하자는 제의를 했고 우린
그날 밤에 같이 술잔을 부딪히며 이야기 꽃을 피웠었다.
그는 술을 참으로 좋아하던 친구였다.
술과 함께 있으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는 듯 했다.
그는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의 미남이기도 했다.
훤칠한 키와 남자다운 외모는 어딜가든 사람의 시선을 끌 정도였다.
그는 비를 무척이나 좋아한 사람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안은
혼자서 술을 마시며 비를 마음껏 즐기곤 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늘 염려의 전화를 걸곤 했었다.
그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듯 했고
많은 말을 했으며 자기의 모든 속내를 다 열어 보였었다.
나와 술 마시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겼었고
어느 자리에서든 항상 사람들에게 내가 자기의 친구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했었다.
나는 사실 그의 나이를 정확히 몰랐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았으며
그리고 끝까지 우린 서로에게 깍듯한 경어를 사용했었다.
가끔 주변의 사람들이 친구이면서 왜 경어를 사용하냐며
고개를 갸웃하고 물어 올 때도 우린 그냥 웃기만 했을 뿐,
한번도 경어 쓰는 일을 멈추려 한적은 없었다.
그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3년 남짓이었다.
그는 가끔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일을 즐기기도 해서
어떤 때는 서해의 외연도라는 섬에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으며,
또 어느 때는 춘천에서 둥지를 틀었노라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불쑥 다시 서울로 돌아와
내 앞에서 수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기도 했다.
춘천에 있는 동안은 그는 물안개를 참 즐겼었던 모양이었다.
어느날 그는 호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횟집에 앉아서
혼자 술을 마셨다고 했었다.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 문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정신을 앗겨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 보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새벽 네 시가 되어 있더라는 말도 했었다.
난 그의 넋을 잃게 했을 정도의 물안개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고,
우린 함께 청량리에서 새벽에 춘천행 총알택시에 몸을 실었다.
난 그날 호수의 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두려우리만치 내 몸을 감싸오는
하얀 물안개를 원없이 바라보았었다.
그는 팝송을 즐겨 들었으며 그 중에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를
가장 좋아했고 '짚시바이올린'이란 경음악을 즐겨 들었었다.
난 그가 서울의 어느 구석에 있든 늘 찾아 다녔고 그는 나의 방문을
가장 즐거운 일로 여기고 기뻐했었다.
레스토랑 주방장으로 직업을 바꾼 그는 손수 가장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고
날마다 전화통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이야긴 늘 끝이 없었다.
그와의 이별이 찾아 온것은 내가 회사를 따라 파주로 이사를 했고
그가 나를 따라 파주로 이사를 온뒤 채 일년도 지나지 않아서 였다.
그간 그는 그야말로 운명처럼 다가온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귀여운 딸을 둔 어엿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두어번 또는 그가 원하는 때 언제든지 그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들렀고 그러면 그는 항상 서너병의 소주를 미리 준비해 두곤 했었다.
그땐 왜 그리 술도 취하지 않았을까......
일을 도와가며 얘기를 나누며 컵으로 나누어 마시던 술은 금새 바닥이 나고
또 두어병의 술이 더 필요했으니, 또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았던지......
그는 순수한 가슴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상을 향한 진실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무한한 감동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별은 찾아오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그와 내가 임진각의 벤취에 앉아서
오토바이 라이트 불빛을 조명삼아 술을 마신 뒤 몇일이 지나지 않아서
그는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갔던 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를 택시에 태워 보낸뒤 오토바이를 타고 뒤따라 오던 길에
불의의 사고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마지막 길을 그는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듯이
내가 미리 가서 그의 주검을 받아주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가 어느 작은 병원 앞 벤취였고
예정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는 친구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내 앞에 택시 한 대가 급하게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운전사가 도와달라는 말에 차안을 들여다 보던 나는
거기 누워있는 사람이 내 친구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 놀란 나머지 거의 정신을 잃어 버렸던 것 같다.
의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나는 벤취에 드러 누운채 한동안 일어 날 줄을 몰랐다.
누가 나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던듯 싶다.
비틀거리며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왔고 친구의 부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이 된 심정으로,
저승길에 같이 동행이 되지 못한 것을 너무너무 후회하면서
친구의 죽음을 알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죽던 날,
마지막이 될거란 많은 암시를 주었던 것 같다.
퇴근 후 아내를 불러 평소 먹고 싶다던 음식을 사주었고,
나에겐 문득 우리가 가끔 들렀던 약수터에 가서
물 한 잔을 마시고 오고 싶다고도 했었다.
나는 그러자고 했고 물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건널목을 건너기전
그가 오토바이를 세우고 시동을 끄더니 갑자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했었다. 아마 그것이 그동안 가장 사랑했던 친구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 아니었나 싶다.
자기 아내에게 살아오면서 미안했던 점을 이야기했고
우리의 만남이 정말 아름다웠노라는 이야기도 했으며
혹 앞으로 내가 시를 쓰는 꿈을 이루게 되거든
이러이러한 시를 썼으면 좋겠단 이야기도 했었다.
그가 다시 오토바이 시동을 켜고 건널목을 건너던 그 순간은
아직도 나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고보니 그날 친구의 표정도 유난히 어두워 보였던 것 같다.
그의 시신은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달려와 화장을 했고
나는 그 재를 행주대교 아래에서 강물에 뿌려주었다.
평소 좋아하던 바다를 마음껏 보고 살라고,
그 넓은 곳에서 이제 슬픔없이 편하게 살라고,
강물이 바다까지 친구의 유해를 잘 데려다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후 일년이 넘도록 나는 그 친구가 일하던
레스토랑이 있는 골목을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는지 한발짝도 들여놓지 못한채
항상 그 앞을 서성이기만 했었다.
어느날 용기를 내보리라 다짐하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두 눈을 질끈 감고 그 골목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거기엔 내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던 계단이며
그의 마지막을 보았던 병원 앞 벤취도 거기에 있었다.
그것들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 그제서야 나는 그 친구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 들였고 드디어 마음속에 추억으로 묻을 수가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 친구의 이름을 수시로 부르곤 한다.
그가 남긴 편지를 가끔 꺼내보기도 한다.
더러는 꿈에서 그를 보는 날도 있다.
여전히 멋있고 당당하던 그 시절 친구의 모습이다.
오늘 처음으로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그 친구를 이렇게 글속에 꺼내 보았다.
나에겐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어쩌면 이 글이 그 친구를 향한 마지막 의식일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내 가슴속에 그의 묘비를 세우는 마지막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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