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양승본 선생님

푸르른가을 2011. 6. 2. 18:15

누가 이사람 앞에서 가난을 말할 수 있는가. 이보다 더 배고픈 설움을 당해본 사람이 이세상에 과연 또 있을까.

그렇다. 경기도 영덕고등학교 양승본(57) 교감선생님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어느 한자락을 뚝 떼어내 보이더라도 이보다 더 기구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주인공이다.

그러나 일단 교단에 올라서기만 하면 가장 재미있고 가장 신나는 강의로 학생과 교사를 단숨에 사로잡는 능력을 지닌 신들린 선생님이다.

학교로 찾아가 그를 만난 첫인상은 차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난히 작은 키에 단단해 보이는 몸매가 차돌을 연상시킨다.

6살 때 그는 한국전쟁을 만났다. 경기도 용인이 고향. 전쟁이 났다는 것만 알고 아무영문도 모른 채 부모손에 이끌려 피난길에 나섰다.

평택근처로 기억된다. 그의 부모형제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아침밥을 지으려고 부산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어린 그는 인근 물가로 밥지을 물을 뜨러 갔다. 그사이에 부모형제가 있는 자리에 155mm 포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밥지을 물을 퍼올리던 중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그는 정신을 잃었다. 마을사람들이 밥을 지으려고 모여있는 바로 그 자리에 포탄이 빗발치듯 떨어지면서 그 파편과 폭풍이 물을 뜨러 온 거기까지 날아와 그를 덮친 것이다.

같이 온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러나 포탄을 피해서 반대쪽으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탄이 떨어지는 죽음의 현장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부모형제가 있는 그쪽으로 본능적으로 달려간 것이다.

6살 아이의 눈에 비친 현장은 너무도 처참하고 끔찍했다. 포탄에 맞아 공중에 붕 떴다가 파편 조각들과 함께 뒤엉켜 산산이 부서져 땅에 떨어지는 수많은 인간의 살점들. 그것은 인간의 살점이 아니라 흩어져 흐물흐물거리는 두부덩어리 같았다. 눈깜짝할 순간에 그는 그렇게 부모형제를 모두 잃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

혈육이라는 혈육은 다 끊어지고 혼자만 남은 6살짜리 전쟁고아. 엄마 앞에서 응석이나 부릴 그 어린 나이에 그는 소년가장도 아니고 애기가장이 되었으니 이를 어이할꼬. 험한 난리통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랴.

그러나 그는 또래보다 영악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뭐든지 다했다. 잔디뿌리를 캐먹고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먹었으나 그것으로 어찌 배를 채우랴.

전쟁이 끝나고 양부모를 만난 이후 마음의 의지를 받았으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거지 양아치 깡패 똘마니 노릇도 해보고 심지어는 사창가 접대부들의 잔심부름까지 하면서 험한 세상 속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워나갔다.

그런 속에서도 공부만큼은 열심히 해서 중고등학교는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인천교대를 거쳐 경기대 교육대학원까지 나왔다.

방황할 때 배고픈 설움이 가장 컸고 다음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은 추위였다. 먹고 잘 곳이 없었던 탓에 겨울이면 전신이 동상에 걸려서 고생을 했다.

봄이 되면 온몸이 가려워서 동상이 풀리는 두달동안은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 지독한 고생을 계속하면서도 삐뚤어지지 않았다.

깡패 심부름을 하면서도 '내가 커서 깡패는 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잔디 뿌리를 캐먹고 소나무 껍질을 베껴 먹는 최악조건 속에서도 공부만큼은 목숨걸고 했다.

고단한 현실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자연스럽게 글쓰는 버릇이 생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글쓰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학창시절 크고 작은 백일장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주로 시를 쓰다가 군대 제대후에는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문단에 등단도 수필로 했다.

83년부터는 소설을 본격적으로 썼다. 그가 세상에 발표한 소설의 첫 작품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룬 '겨울 아지랭이'. 고아의 설움과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하기까지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 이후로 시, 수필, 소설, 동화, 꽁트 등 다양한 장르로 1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지금도 그는 경기일보, 경인일보, 영농신문, 국방일보 등에 작품을 집필 및 고정연재 해오고 있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온갖 역경을 이겨낸 그의 기구했던 인생살이 자체가 폭넓은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면서 글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그는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경기문학인협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인천교대 3회 졸업생. 졸업하던 66년 3월1일 경기도 미곡초등학교 교사로 첫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발령 받은지 얼마 안돼서 군대 입대하여 대북방송 아나운서로 복무했다. 제대후 발령받은 곳은 안성에 있는 개산초등학교.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중등학교 교사 검정고시 역사과목에 합격하여 개산초등학교 교사를 떠나 안성중·고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는다. 다시 용인여고, 수원여고에서 근무한다.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그는 다시 교육 전문직 시험에 합격하여 안성교육청 연구사와 수원교육청 장학사를 거쳐 율곡 교원연구원 교육 연구사로 들어갔다.

그후 현재의 영덕고등학교 교감으로 왔다. 영덕고등학교는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신생학교다.

그는 교사생활을 신명나게 했다. 젊었을 때 생활지도 담당교사로 있으면서 그는 특히 학생깡패는 철저하게 지도해서 모두 바로 잡았다. 과거의 방황했던 생활이 폭력 학생 지도에 도움이 되었다.

여고교사때 교내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는 인기도 짱이었다. 강의를 재미있게 한 것이 인기 비결.

주로 선생님들을 상대로 강의했던 율곡교원연수원 근무때도 그는 인기가 좋았다. 강의전에 충분한 자료준비는 물론 연구를 철저히 하고 거기에 전국웅변대회에서 100차례나 입상한 경력을 바탕으로 열강을 한다.

병원한번 가본 적이 없다는 강골. 동작이 민첩하고 부지런하다. 걸음걸이도 경쾌하고 활기가 넘친다. 단체로 등산을 가더라도 젊은이들보다 더 걸음이 빨라 항상 선두에 선다.

22살 때 첫발을 들여놓은 교직생활이 어느덧 36년째에 접어들었다. 교사교육에 대한 공로로 지난 5월 제12회 경기사도대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재미있고 유머가 넘치는 그의 수업을 받는 중에는 떠들거나 조는 학생이 단 한명도 없었단다. 지금도 그는 현직교사를 상대로 하는 강의와 각학교에서 실시하는 학부모 교육 초청강사로 자주 나간다.

강의 할 때 그는 신들린 사람이 된다. 강의실 전체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온몸으로 강의를 한다.

60을 바라보는 나이도 잊은 채 온몸으로 강의하는 교감선생님 양승본. 그는 한마디로 톡톡 튀는 타고난 교육자였다.

〈미디어칸/김명수기자 ms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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